돌아가기
3 이러한 교회가 어떻게해서 만들어 졌는지 그 풍경을 돌아보면
사건Ⅰ 커다란 시대의 흐름속에서 햐쿠닌쵸교회는 태어났다.

평신도의 시대―교회는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가?

 어떤 전도자가 있었다. 해외유학을 마치고 비행장에 게타를 신은 모습으로 내렸다고 전해 들었다. 아사노 쥰이치浅野順一목사. 아오야마가쿠인青山学院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시부야渋谷에 교회를 세우셨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청년도 많았다. 힘있는 설교, 훌륭한 사람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안에 후에 햐쿠닌쵸교회 설립에 있어 중심 되는 멤버들이 있었다. 목사님이 시작한 미타케美竹교회는 많은사람들로 넘쳐 주일예배만이 아니고, 기도회, 성경공부, 사회문제연구회에 청년들이 모여 서로간의 뜨거운 마음을 나누곤 하였다. 같은시기에 교회 밖 여러 곳에 가정집회가 있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아이들을 모아 교회학교도 많이 모였다. 아사노목사를 중심으로 모인 많은사람들의 기대에 응해 새로운 교회가 각지에 만들어졌다.
 그런 가운데 아사노목사는 미타케교회의 담임을 사임하고, 후임자를 앉친 후, 기누타砧 교회로 옮기셨다. 그 때부터 여러 일들이 발생했다. 미타케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은 아사노목사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한달에 한번이 되었기에, 기누타교회로 옮기는 사람도 있었다. 남은있는 사람들 일부는 후임목사의 설교에 대해 불만이 축적되어 있었다.
 당시의 대학생들은 취직을 하게되고, 다른사람의 갑절을 일하라 하신 아사노목사의 훈도를 좋아하여, 각자의 분야에서 중추가 되어갔다. 또한 교회학교 소년소녀는 대학생이 되어 청년회를 담당했다. 젊은이들은 각자 그룹을 만들어 활동했다. 신학생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이 졸업 할 무렵, 학원사태가 발생했다. 늦기는 했지만 동경신학대학에도 영향이 미쳐, 신학생들이 농성에 돌입했다. 미타케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신학생들도 예외없이. 안타까운 것은 아사노목사의 후임목사는 동경신학대학 교수였다. 학생들은 후임목사가 동경신학대학교수라는 것을 이유로 예배참가를 거부하고, 문앞에서 항의활동을 했다. 교회안은 찬반 양론으로 어수선해졌다. 학원사태는 과격화 하고, 많은 대학에서는 기동대를 도입해 치안을 확보했다. 그것을 흉내내려 했는지 신학생들이 미타케교회에 들어와 예배를 방해하는 것을 염려해、후임목사는 경찰에 협력을 요청하려 했다.
 교회에 국가권력을 도입하는 것에 대한 찬반으로 교회내부는 두쪽으로 갈라졌다. 신앙의 깊이에 비추어 국가와 일선을 그어야 한다는 의견과 폭력에는 경찰의 힘이 필요하다는 의견. 반년을 넘게 양파가 논쟁을 하는 한편, 20대로부터 40대에 이르는 사람들이 교회는 국가로부터 독립해야한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미타케교회를 떠나, 독자적으로 집회를 시작했다. 당초에는 각가정을 옮겨가며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다. 그것이 햐쿠닌쵸교회의 전신이었고, 1970년 11월 1일부터 미타케기도예배라고 공개하고, 이듬해 4월 미타케교회의 정기총회에 출석하여 결별을 선언한 후에는 오쿠보집회라고 이름지었다. 미타케교회를 떠난 후 40년 그 걸음을 멈춘 적이 없다.
 평신도만인 공동체의 출발이었다. 일요일, 교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예배라기보다는 기도회라고 하는 편이 나은 모임으로부터 시작했다. 하나님께 어찌하면 좋을지 기도하며 함께 이야기했다. 오쿠보에 위치한 일본기독교부인교풍회의 방 하나를 빌렸다. 미타케교회를 나온 이유를 알고 도와주며 설교해 주신 목사님들도 많았지만, 월 1,2회는 교인들이 교대로 설교대신에 말씀을 전하며 기도를 이어갔다.
 주보를 만들 때, "설교"를 어떻게 표현할까 논의를 반복했다. 목사도 아닌데 설교라고 하기가 어렵고, 평신도가 말할 때는 내용에 따라서 "장려", "성경연구"로 하였다.
 길을 떠난 것은 좋았지만 모든것이 시행착오, 미타케를 나와 우리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형성, 언제나 이제그만 해산하자는 말과 함께 필사적으로 지키지않으면 우리들의 행동가 무엇이었는지 논쟁으로 얽히고, 고민하며 우왕좌왕 했다. 논쟁이 격해지면 목소리도 커지고, 큰소리로 싸움처럼 들리는 토론도 이어졌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야기가 계속되고, "평신도 만으로 좋지않은가" "아니 목사가 필요하다". 논쟁이 끝이나지를 않는다. 예배후에는 식사를 위해 가까운 소바집에 갔다. 거기서도 논쟁이 계속된다. 모두 일로 바쁜 세대. 시간이 모자란다. 누군가가 말했다. "차라리 밖에 나오지 말고, 식사를 예배에 이어서 같은 공간에서 해결 할 수 있다면 이야기 할 시간을 더 가질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것도 예배 안에. 주보의 예배순서에 넣기로 하였다.
 지금은 증사 후에 상세한 보고가 있고, 그 후 식사를 하게되고, 그것이 끝나면 응답시간이 되는 것이 정착되어 있지만, 시작 당초에는 식사중에도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계속되었다고 말하기보다는 사회자도 없었다. 끝없이 발언이 계속되었다. 목소리가 큰 쪽이 우선하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것 처럼 말싸움처럼 된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을경우는 시간을 무시하며 계속이어졌다. 화제의 중심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들의 행동은 이대로 좋은가, 평신도만으로 정말 교회가 유지 될 수 있는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서로가 가진 것으로 부닥치는것이다. 너무 격해지면 햐쿠닌쵸만이 교회가 아니라하며, 자신의 장을 찾아서 조용히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2년반이 지난 후 독일 유학으로부터 귀국한 기다木田목사가 참가했다.기다목사는 오쿠보집회의 행보를 높이 평가하고, 그 행보에 신학적배경, 근거를 설정해 주었다. 담임목사로는 모시지 못했지만, 기다신학과 만나고, 우리의 행위에 백그라운드가 되어져, 모두 새로 힘을 내었다.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자유한 분위기가, 이것을 가속시켰다. 서로의 이야기에 바로 반응했다. "토론"으로서 예배순서에 넣도록 되어갔다.
 식사는 하였지만, 도시락을 만들어 올 수 있는 시간이 없는 사람도. 그러면 사러 가자고, 대표가 도시락을 사러갔다. 이것이 얼마간 지속되었지만, 어느날 "사러가는 사람은 토론에 못 참가한다"는 이유로 모두가 마음을 정해 도시락지참이 방침이 되었다.
 이렇게해서 지금과 같은 예배순서가 시작되었다.
 기다목사가 오셔서 모임이 정착되어 갔다.
 그렇지만、"오쿠보집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지금까지보다 더간절한 마음으로 목사가 필요한지 등등에 관한 논의로 뜨거워 졌다.
 교인들의 희망으로 멀리 히로사키弘前로부터 아소阿蘇목사를 모셔 담임목사로.

 
목사님을 모시기 전의 풍경을 로바ろば로부터 보자.

 
발족시의 로바로부터 우리들의 신앙과 교회를 생각해 본다.
 
―(로바)발간에 있어서―이와이 카나메 岩井 要
1.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전에 없었던 심각한 위기감으로 덮여져있다. 경제적 불황, 핵전쟁에 대한 공포감. 환경파괴로 인한 생물의 사멸과 같은 인류의 생존 그 자체에 관한 내용까지, 어느것을 다루어도, 문제는 깊고 크다.
 근대과학의 확립과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의 발전이 시작된 이래, 인간에게 있어 이들 진보는, 늘 인류의 번영과 행복을 약속해 왔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참으로 곤란한 과제는 거의가 이들 진보 발전으로 인한 성과와 등을 맞대고 출현한 문제들이다. 기술문명과 정신문화의 파행상태는 지금이야말로 결정적이라 할 수있다. 인류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에 의해, 멸망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지금과 같이 인간정신의 회복이 주요시되는 시대는 과거에는 없었다.
2. 한편 근대 일본의 발자취에 있어서 기독교가 해온 역할은 어떤 부분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면서도, 다른 면에 서는 권력체제와의 유착의 역사이기도 했다. 명치유신 이후의 일본의 근대화는 천황제를 축으로 국가권력형성에의 행보였으며, 모든 분야는 그 목적을 위하여 동원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회는 농촌과 산업노동자의 전도에 실패했고, 거꾸로 지식층에 접근했다. 그것은 신앙의 지적이해를 깊이하며, 미국과 유럽의 성서와 신학연구를 열시히 했지만, 신앙의 실제 생활과 유리, 관념화를 가져왔다. 그 때문에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던 천황 절대화의 흐름에 저항하지 못하고 무력화의 길로 들어섰다. 더우기 패전에 있어서 일본의 기독교계는 그 체질을 철저히 검토해 재출발하는 것을 하지못했다. 전후 20여년이 지나서 교단은 간신히 "전쟁책임문제", "만국박람회문제"가 이야기 되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자신이 깊이 숙고 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이상의 고찰과 반성에 서려 할 때 우리는 새로운 결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신앙을 확인하고, 그 시대에 진지하게 요구되고 있는 교회를 만들어 가는 책임을 깊이 느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신앙이란, 첫째로 성서에 근거한 복음신앙의 확립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씀을 듣는다는 경건한 태도에 출발한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말씀 중심의 신앙과 교회이어야만한다. 둘째는 주어진 복음신앙을 솔직히 고백하며, 증거하는 교회이다. 그것은 또한 질서와 체제에 매몰하는 것이 아니고, 필요가 있다면 권력에 저항하며 투쟁하는 교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고백과 투쟁을 통해 우리는 진정으로 이웃을 위하여,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교회가 될 것이다. 세번째로 추구 할 것은 복음을 통한 전적인간의 회복이다. 교회는 진정 이점에 있어서 사역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복음서의 설교를 통해 주체적으로 살도록 반복해서 우리들을 격려해 주신다. 교회에 있어서야말로 사람은 참된 인간됨을 회복 할 수 있다고 본다. 네번째로 복음신앙에 서서 사람 만들기를 계속하는 교회가 되고싶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소수자이지만, 기꺼이 자진해서 "일본의 양심"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위해 한사람 한사람이 각자의 현장에 있어서 진지한 마음으로 일하여야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들은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여, 다시 사회에 내어 보내는 것을 책임지고 싶다. 교회는 결코 닫혀진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힘들다. 하지만, 우리들의 소망은 이미 주님에 의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믿고, 기도하며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1971년12월12일・오쿠보집회 회보 제1호)

 여로旅路 중간에서 어떤 회원의 말(수년 후 목사가되어 타카사키에 부임)
  오쿠보집회는 무엇을 위해 있는가?
 
―집회의 앞날을 생각하며― 사사부치 쇼헤이 笹渕昭平
 오늘은 원래대로 한다면 오쿠보집회가 앞으로 선택해야 하는 교회의 형태에 대하여 말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이같은 문제 이전에 더욱 기본적인 부분에 문제의식을 강하게 느껴, 그 점을 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해,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1) 위기에 관하여
 최근 오쿠보집회는 서서히 위기를 향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첫째로 집회는 자기 목적화의 행보를 시작했다. "생활과 성서"에 대한 이야기는 좋았고, 고린도서의 성서연구도 좋았다. 또한 기다木田씨의 구약성서도 공부가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좋은 이야기를 듣고 마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모임은 움짐임이 없다. 싸롱이다. 전도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고, 탁해져 있다. 썩어져 가는 전조가 보인다. 둘째로 교인의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자신의 일은 모두가 열심히 하고 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 힘을 얻고 일하러 가는 것과 같은, 교회와 일과의 관계가 있는지. 거꾸로 교회의 말씀에 걸려 넘어져 일과의 모순에 고민하는 것, 혹은 가정생활등에 관한 문제가 주일예배에서 지적되어 다시 생각하게되는 것이 일어나고 있는가. 거의 NO!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일의 말씀은 상쾌하게 머리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생활과의 관계가 약하다. 이것은 교회와 생활등이 이원화 되어 가는 나쁜 징조이다. 세째로 우리는 보물을 갖고있지만 활용을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은 다른 교회가 부러워하는 실력있는 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이 훌륭한 교인이 10명 모인 힘이 배가되지 못하고, 모임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고있다. 즉, 교회에 모이는 것이 집단으로서의 힘이 되지 못하고 있다.
 
(2)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하여
 그렇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단순한 것이지만 "솔직하게 전도하고, 이웃을 위한 교회로서 출발하는" 것이다. 한사람 한사람이 교회에 의해 살아가고 바르게되는 것과 함께, 전체로서 유기체적으로 더불어지고, 힘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로 교회로서 강한 개성을 가지고 다소의 저항을 물리치고라도 끌어갈 수 있는 견인차를 두는 것이다. 이 견인차는 평신도 집단으로서도 불가능 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대단히 어렵다. 역시 "목사"라는 부분에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둘째로 일본그리스도교단의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 오늘날에 있어 일본의 교회가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함께 지지않고서 참된 교회의 행보는 없기 때문이다. 세째로 예배장소에 관해 많이들 이야기하고 있지만, 주어진 장소에서 착실하게 전도해야만 한다. 이상으로 요컨대 우리는 여기서 행동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지않으면 바로 제구실을 못하게 된다. 여기서 행동해 가지 못한다면 오히려 해산해서 뿔뿔히 흩어져 교회를 만들어 가는 편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더욱 발휘 할 수 있을 것이고, 일본 전도에도 공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로바」호외・74년수양회・1974년7월21일증사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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