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기
사건Ⅱ 아소토시후미阿蘇敏文목사 시대(1975년4월-1996년12월)
 아소목사를 담임으로 모셨다. 기다木田선생의 설득이 먹혔는지, 그렇게도 오랜 친구, 선배가 많은 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했던 아소 목사가 부임했다.
 아소목사는 히로사키弘前에서 자랐지만 어찌되어서인지 미타케교회 교인이었다. 아오야마가쿠인青山学院 신학과에서 아사노浅野교수, 이어서 기다교수께 배웠다. 청년시대에 결핵을 앓고 요양생활. 회복 후에는 미타케美竹교회 청년회의 중심인물. 학원분쟁 전에 졸업. 결혼해서 히로사키에서 중고등학교 성서 교사로. 그러기에 햐쿠닌쵸 사람들과는 오랜 교제이다. 많은 선배들 앞에서 일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햐쿠닌쵸 목사취임을 상당히 주저했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햐쿠닌쵸교회에서는 교인들도 증사証詞를 한다. 기다목사가 월1회, 아소 목사가 월2회, 교인1회 정도로 계속되었다. 그러다 아소 목사가 죠시가쿠인女子学院의 성서교사를 하게 되었다.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선배들이 찬성하자 그것도 괜찮겠지하는 의견으로 돌아섰다. 히로사키 시절의 아소목사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가해 세계각국을 돌아 다녔다. 여러나라 사람들과 교류를 그 시절에 가졌었다. 햐쿠니쵸에 부임하고 나서도 한국, 필리핀, 미국등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핵병기폐지, 해외이주노동자의 권리확보, 일본인과 필리핀인사이의 혼혈아동 지원,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권리확보 등의 활동을 해왔다.
 교단에 가입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젊은 층에서는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않았다. 단립으로 있으면 예배형식이나 실제의 활동에서도 독자적으로 할 수 있지만, 교단에 가입하게되면 여러모로 구속되리라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의견을 나눈 끝에 자신들의 주체성을 잃지않고 교단의 짐을 함께 져가기로 하여, 총회를 열어 확인하고 가입 수속을 했다. 하지만 교풍회矯風会의 같은 울타리안에 교단의 "오쿠보교회"가 이미 있었기에 수속은 간단하지 않았고, 결정되기까지 6년이 걸렸다. "오쿠보"라는 명칭은 사용할 수 없었기에, 새로운 이름을 짓지않으면 안되었다. 지명을 빌려 햐쿠닌쵸교회라고 하자는 안과 민수民数교회로 하자는 안이 제안되 의논한 결과 전자로 결정. 교인으로는 지금까지 출석했던 사람으로 정했다.
 교회당을 어떻게 할것이지 의논. 모두가 힘내면 준비되리라는 의견, 그 필요성, 아니 필요없다, 이것을 가지고도 격렬한 논쟁. 이렇게 도심 한 복판에 자기 건물을 갖기에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든다. 그 때문에 많은 공을 들이는 것이 득책인가. 결론을 못내렸다. 우선 빌리는 방향으로. 조금이라도 활동비에 쓰자고. 그 후 40년 가까이 교풍회의 한 방에서.

 아소목사가 오셨기에 그렇게 됐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 수양회가 재미 있었다. 1박으로는 모자라 2박3일로 했지만, 소프트볼 대회와 함께 열렸다. 의논도 했지만, 바쁜 중년 분들의 휴식도 겸해, 여유 있는 스케쥴로 등산이나, 물고기 손으로 잡기를 계획하기도했다. 교인들의 자녀들도 많이 모였다. 캠프화이어, 귀신놀이, 사생대회, 무엇을 해도 재미있었다. 마시는 일도 필수. 마시면서 밤 늦게까지 논쟁. 한때는 참가자가 50명도 되었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투쟁의 시대, 그것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해 한국교회와의 연대를 모색했다. 교인 한 분이 농촌전도신학교의 사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와 계시던 한국의 잠실희년(중앙)교회를 개척하신 박성자 목사와의 만남이 있었다. 한국에서 일본에의 도항이 까다로웠던 시기, 그러기에 더욱 인적, 금전적 지원이 필요로 했었고, 자매교회가 되기로 양교회에서 결정했다. 그 후 30년에 걸쳐 교류를 계속 해 왔다. (『東アジアの平和とキリスト教』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잠실중앙교회에는 후에 햐쿠닌쵸교회의 목사가 되는 가 목사가 계셨다.

 발족 당시는 신년회가 매년 열렸다. 각 가정을 돌면서 열렸다. 예배가 끝나면 바로 마시기 시작. 어쨌든 잘 마셨다. 마실수록 논쟁도 활발해 진다. 단가短歌, 하이쿠俳句를 짓고, 그것을 좋다 나쁘다 싸워가면서 모두가 평가. 공동체로서의 결속도 이렇게 하면서 성장했을 것이다. 결속 외에는 모임을 존속시킬 수가 없었기때문이었던가. 지금도 고난주간에는 각 가정을 방문하는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성경공부도 가정집회도 식탁을 함께하는 것으로 모임이 시작된다.
 교회총회에서 몇번인가 해산하는 것도 논의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창립의 원점에 돌아가 처음 신앙에 비추어가며 존속을 계속해 왔다.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