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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Ⅳ 가정순 목사 시대(1997년 1월~현재)
 가목사가 처음 자매교회와의 교류를 시작했을 때에는 그것에 반대하는 최선봉이었다는데. 어떻게 해서인지 햐쿠닌쵸교회에? 자매교회로부터 파견된 것이 아니고, 햐쿠닌쵸교회가 청해서 모셨다. 여기에는 가목사의 긴 변화의 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가목사의 일본어 능력에는 경탄한다. 어디서 그렇게 습득하였는지! 억양도 틀리지않고,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일본인으로 착각한다. 감성적으로도 공통되는 곳이 있어서인지.
 거기다 컴퓨터에도 강하다. 정리하는 것이 서툴렀던 아소목사를 대신해서 햐쿠닌쵸의 기록을 정리해서 컴퓨터에 저장했다. 지금까지의 증사証詞자와 제목, 처음 시작때의 예배장소와 일지, "로바"의 책자화, 주보의 기록, 40년간의 사진정리, 그 외의 것들도 정리되어 이 소책자가 만들어졌다.
 증사를 준비하기위해 많은 시간을 공부하신다. 일본의 역사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교인들이 거꾸로 일본의 사실들에 대해 많이 배운다. 그것도 일본어 서적으로 부터이다. 사전도 좋아하는 것 같다. 한국과의 교류에서는 햐쿠닌쵸만 밖에서도 통역의 역할을 담당하신다. 본인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의문이 많은 목사이다. 그것이 오히려 깊이를 더한다.
 긴 한국교회와의 교류의 결과 열매맺은 결실이다. 누구든 그 세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정순 목사님 청빙의 경위
 1995년 11월 26일의 증사証詞 중 아소목사가 갑자기 사임을 표명, 모두가 깜짝 놀라 어째서 그만두는지, 아소목사가 없는 교회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등을 염려하며. 12월 3일 임원회에서 정식으로 사임을 표하였기에, 2회에 걸친 교회 간담회를 마친 후, 96년 4월 14일의 교회 총회에서 사임을 승인. 97년 3월말까지 담임목사를 청빙, 담임목사청빙위원회 설치를 결정. 위원회는 임원회 임원 외에 소위원회 위원 3인.
 차기목사를 선임 할 때에 현 목사의 주장이나 유력교인의 추천등이 적지않겠지만, 위원회는 기본방침으로서 교인(관계자) 한사람 한사람의 의견을 철저하게 들을 것과 협력목사는 물론, 교회의 행보에 협력하며 지금도 관심을 갖고 있는 출신목사에게도 의견을 들을 것 등을 정했다. 장래의 햐쿠닌쵸를 함께 만들어 가기로, 모두의 의지로 후임목사를 정하자는 것이었다.
 이 방침에 따라 우선 "앞으로의 햐쿠닌쵸 교회를 생각하자"는 앙케이트와 함께, 구체적인 이름과 그 이유를 적도록 하는 후보추천 앙케이트도 실시했다. 앙케이트와 병행하여 그 결과를 가지고 워원회 만이 아니라 교회 간담회와 여름수양회 등에서도 논의했다. 협력목사 등으로부터도 충분히 의견을 들었다. 이들을 종합하여 가목사가 최적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96년 12월 8일의 임시총회에 청빙을 제안했다.
 그 동안 예배의 응답시간과 간담회, 그 밖의 교인들간의 이야기 등에서 여러모로 의견이 교환되어졌다.
 아소목사는 정말로 농사지어 생활이 가능 할 지, 후임목사와 잘 협력이 될 지, 미타케美竹교회 처럼은 되지 않을는지, 후임목사가 일본의 풍습을 모르는 외국인일 경우라도 잘 해 낼 수 있을는 지, 장례식이나 결혼식은 괜찮을 지, 햐쿠닌쵸교회는 대단히 활동적인 교회인데, 지금까지와 같이 해 갈 수 있을는지, 햐쿠닌쵸가 해온 방식은 바꾸고 싶지 않다. 교회당도 목사관도 없는 교회에 후임이 될 분이 허락 할 지, 등등.
 임시총회에서도 여러모로 의견이 교환되고, 충분히 논의 되어진 후 만장일치로 승인되어, 가목사가 1997년 1월 1일 아소목사로부터 햐쿠닌쵸교회 담임목사의 바톤을 이어받았다.
 위에서 말한 교인들의 염려들이 전혀 기우였다고 알기까지에는 긴 시간이 필요없었다.

가정순목사님 취임시의 풍경

―내가 배워 온 교회―

 저는 글을 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글이 서투른 이유도 있습니다만, 만일에 잘 못해서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거나, 아니면 정리도 안된 글을 쓰는 것으로 나중에 곤란한 입장에 처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려서부터 배어 온 말도 어려운데, 성인이 되어 배운 언어로는 더욱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글을 쓰지 않아도 될 리는 없으므로, 앞으로는 될 수 있는한 두려워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써 가야 하겠다고 마음에 다져 봅니다. 사람들에게 오해 받지 않는 글, 그리고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알기 쉬운 말로 쓰고 싶은 것이 지금의 소원입니다만, 거기까지 도달하기 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이런 말로 시작하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오는 2월28일로 제가 일본에 온지 만 5년이 됩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5년전 한국을 뛰쳐나오듯이 일본에 온 것은 정말로 잘 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간에 몇 번인가의 실패도 있었습니다만, 그것도 모두 저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고, 일본에 있었기에 경험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저의 일 터였던 교회를 떠나서 한 사람의 자유인으로서 생활 할 수 있도록 보살 펴 주셨던 것은 햐쿠닌쵸교회 였습니다. 그간에 여러 곳에서 많은 배움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농촌전도신학교에서, 릿쿄대학의 기다木田선생님 밑에서, 그리고 목욕탕 청소, 트럭운전등의 아르바이트의 현장에서, 또한 햐쿠닌쵸 교회의 교인으로서,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만, 그 모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배움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금년 1월부터 햐쿠닌쵸교회의 담임목사로서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것이 저 자신에게, 또한 햐쿠닌쵸교회로서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생각하는 것이 최근의 중요한 일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생각을 정리하기에도 앞으로 몇년이 걸릴 지 알 수 없습니마만, 끊임없이 생각해 갈 까 합니다. 일본에는 여러 교파와 교회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 햐쿠닌쵸교회는 나름대로 독자적인 행보를 하면서 지금까지 27년간 어떤 역할을 담당 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역사와 전통이란 면에서 보아 제 자신이 그것에 어울리는 사람 인지는 자신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햐쿠닌쵸교회는 저와 같은 사람을 키워 주실 수 있는 좋은 것들을 갖고 있다고 생가하므로 안심하고 앞으로 많은 것을 배우려는 자세로 교회 일에 전념하려고 합니다.
 아래에서는 지금까지 제가 햐쿠닌쵸교회의 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배워 온 것 중에서 교회라는 것에 대해 조금 생각 한 것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저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3살 때 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 할 때 까지 몇십명 있는 교회학교 친구들 가운데서 언제나 모든 상을 독점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다녔던 교회는 율법적인 성격이 강하고 엄격한 교회 였습니다. 그 영향은 현재에도 제 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을 가끔 느낌니다. 그리고나서 성인이 된 후에는 잠실희년(중앙)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해지기가 어려웠습니다. 교회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을 비록하여, 성경의 읽는 자세, 신학적입장의 차이로 상당히 고민하는 시기가 있었고, 익숙해지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그런 흐름 속에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하겠습니다. 환경이란 역시 무서운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더욱 새로운 환경과 만나고 있습니다. 최근 5년간도 역시 변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같은 흐름 속에서 저를 고민하게 했던 것은 신앙의 형태였습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신앙의 형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회의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위해 태어나, 일하시고, 돌아가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 안에는 여러 신앙의 형태가 있어서, 우리들은 그 가운데서 선택을 해 왔습니다. 그 각각이 갖고 있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피안적이고, 자기이익적인 형태가 강했다는 것을 부정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모두가 나빴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어떤 사회가 한 명의 독재자에 의해 지배 당할 때에, 교회는 또한 그 지도자들은 체제에 영합하기가 쉬었습니다. 그 결과는 지금까지의 역사가 잘 말 해 주고 있습니다. 같은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신앙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지배를 고백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이 지금 이 세계에서 일 하고 계신 것을 믿고, 그 지배하심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전쟁책임고백이라는 것은 그 하나의 구체적인 신앙고백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도 그 하나의 신앙고백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세상에서의 역할은 하나님의 구원사업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그를 위해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는 개인의 죄에만 초점을 맞추어 온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배세력에게 더욱 지배하기 쉽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배를 부정하는 세력에 저항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역사 안에서 인간을 소외하고, 억압하는 모든 세력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속에 있는 그와 같은 요소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교회도 스스로가 갖고 있는 그 어떤 권인적인 요소들도 부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지난 2천년간 축적해온 교회의 체질을 바꾸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역사를 하쿠닌쵸 교회와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부터 보았습니다. 그것은 동경신학대학문제, 아오야마가쿠인青山学院신학과 폐지에 대한 소송, 야스쿠니靖国신사의 국영화 반대, 한국/조선인 BC급전범의 재판등, 인간을 소외하고, 억압하는 여러 문제에 교인들 한사람 한사람이 관련을 가져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우리들의 신앙때문에 우리 교회는 열린 공동체이어야만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의 상당수는 세상에 대해 폐쇄적인 자세를 취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그와같은 교회는 스스로를 속된 세상과는 다른 성스런 장소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교회는 스스로를 속된 세상으로부터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많은 갑옷으로 무장해 왔습니다. 그 때문에 신앙은 배타적, 차별적 요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좁은 의미로서의 교회를 틀 외에도, 국가와 민족, 종교라는 틀마저도 뛰어넘어 개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같은 정황안에서 우리가 미국과 유럽의 교회만이 아니고, 아시아의 교회, 혹은 제3세계라고 말하는 지역의 교회와 함께 걷는 역사를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햐쿠닌쵸교회는 한국이나 필리핀 교회, 그리고 그 신학과의 교류, 또한 나라와 종교를 넘어 민중운동에의 지원활동등을 해 왔습니다.
 이상으로 말씀드린 것은 우리들이 전혀 새로운 교회라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우리들 각자의 신앙, 또한 공동체로서의 자세를 성서의 전통에 서서 다시 한번 돌아보고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서로 이해하며, 배워가며, 격려하며, 또한 긴장하는 관계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햐쿠닌쵸교회는 교인 한사람 한사람이 각자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서로 관심이나 지원을 해 왔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은 이번 5년간 제가 햐쿠닌쵸로부터 배운 것중 일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만, 다른 것들을 포함해서 모든 배움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로서는 아직 문장으로서도, 생각으로서도 정리되지 못한 곳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배워가며, 계속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과의 새로운 만남, 또한 열린 관계를 즐거운 마음으로 만들어 가고저 합니다. 저는 이같은 생각 속에서 각자가 일본인, 한국인이라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저 자신은 목사로서의 사역을 포함해, 저 자신이 햐쿠닌쵸의 멤버라는 것을 소중히 여기며, 만일 제가 한국인으로서 어떤 도움이 될 것이 있다면, 그 때 그 때 해 가려고 합니다. 특히 서로에게 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한일간의 우리에게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로바」133호・1997년5월25일 가정순)

 40년간의 긴 여행,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발족당시 중추였던 사람들도 80살 전후가 되었다. 예배에도 특별한 때 이 외에는 출석을 못한다. 일선에서 활약했던 조각가, 변호사, 교수들. 지금도 현역으로 일하는 사람도 많고, 돌아가신 분도 있다. 기다木田선생께서 학장을 맡아 야마나시山梨에 옮겨가신 영향도 크다. 햐쿠닌쵸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 때 그 때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햐쿠닌쵸의 모습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목사의 영향도 있어서, 한국으로부터의 유학생, 일하러 온 분 등 젊은 사람도 모이게 되었다. 지금도 햐쿠닌쵸에 머물러 예배에 참가하는 사람들, 도중에 들어 온 사람들, 노령의 선량한 시민들이 많다. 지금의 모습 그대로일지는 모르지만, 어찌됐든 앞으로도 나이는 먹어간다. 40년을 맞이 해 무엇이 가능한 지?
 이같은 생각에서 이 소책자를 만들기로 하였다. 햐쿠닌쵸교회의 창설이념을 과장해 말하면, 시대를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서였다.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고, 활동을 계속하려 한다면 그런 생각을 버리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있다. 여러 생각들이 부닥치는 곳, 그것이 햐쿠닌쵸가 아닌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옛사람은 말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이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한다. 그 사이에 존재한다.
 기다 선생은 말했다, 「성서는 주체성을 환기喚起한다」.
 이곳이 원점인가. 여행이 시작한 것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앞으로도.
 기다 선생은 계속해서 말했다, 「개個는 전체全体에 우선한다」.
 우리는 생각하는 시점視点을 받았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생각한 것에 따라 행동하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런 햐쿠닌쵸의 풍경, 시대의 흐름 속에 한 장면으로 그려 보았다.
 새로운 사람들은 새로운 걸음을 시작 할 것이다.
 완벽함을 원하는 삶에 대항해서, 자유하고 대범하게, 불완전한 채로.
 그것이 어떤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생각이었지 않겠는가.
 우리는 언제인가 먼지가 되어 사라져 간다.
 아주 조금의 즐기려는 마음, 하나님도 분명 용서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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