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기
사건Ⅴ 그 외의 여러 풍경
✚글 서두의 햐쿠닌쵸의 경치에서도 나온 지란양, 들려오는 소문으로서는 난민인정은 어렵고, 강제송환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터어키로, 엄마는 필리핀으로. 부모와 자식이 갈라진다. 마지막 재판 날, 햐쿠닌쵸에서는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그곳에 기적이 일어났다. 사회정세가 변했는지, 정부의 방침이 변했는지, 재판소의 양심인지, 최후의 판결은 "화해". 일본에서의 체재허가가 나왔다.

✚오키나와에의 여행을 생각했다. 사람들이 거의 가지않는 "가마"(자연동굴)안에 오키나와 교회 분의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안은 어둡고, 그곳에서 묵도했다. 사람들의 신음이 들려오는 듯 했다. 전쟁은 안된다. 헤노코辺野古의 미군기지 반대 현장에도 갔다.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눈을 조금 떴더니 새빨간 태양이 수평선에 막 떨어지려고 하는 웅대한 자연에 압도당했다.(로바152호)

✚길을 걷기 시작했던 시절, 몇번인가 해산하자는 말이 나왔다.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게는 달리 갈 곳이 없어." 그래서 계속하기로 정했다.

✚로바의 집이 태어나기 까지
 최근, 햐쿠닌쵸교회 외의 몇명의 사람들과 하치오우지八王子에서 성서를 읽는 모임을 한달에 한번 갖게 되었습니다. 모이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살아가는데 있어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사토코里子(일시적으로 맡아 기르는 아이) 이든지 자기 아이 이든지 아이를 키우는데 여념이 없는 남녀입니다. 제가 오쿠보집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은 1977년 크리스마스 전이었습니다. 제가 결혼 할 지도 모르는 상대가 타카하시히로유키高瀬浩之(크리스챤)라는 것 만 알고 있었던 때 였습니다. 매우 과묵한 그를 알기위해서는 그가 다니는 오쿠보집회에 가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는 부부가 함께 예배에 오는 분들이 지금보다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도 열명 정도 모여 있었습니다. 오쿠보 집회의 인상은 어른도 아이도 자기를 분명히 주장하는 집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타카하시히로유키는 침묵하고 있는지" 라는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 오쿠보집회에 모이는 사람들에의 이해는 깊어져 가는 것이었습니다. 예배 안에서 점심을 같이 하는, 그를 위해 "도시락 당번"이 있고, 교대로 "고모쿠이나리五目いなり를 원하는 사람?" "김밥?" "그 외" 라고 주문을 받아, 전차를 타고 사러 갑니다. 예배 후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알콜종류를 주문하는 사람도 몇명인가 있었던 것에 매우 놀랐습니다. "이 사람들이 정말로 크리스챤인지?" 라는 의심도 더해가고, 그 반면에 "나도 크리스챤이 될 것 같다"는 확신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쿠보"라는 이름으로 부터 "햐쿠닌쵸"로 이름이 변화기 직전인 1981년 크리스마스에 시바하라테루코柴原照子씨, 이마사토미요코今里三代子씨 세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3년정도 전부터 성경공부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서 였던가 성경의 내용보다 참가자의 주체적인 의견에 많이 자극받아, 저도 자기주장이 가능한 사람이 되어 갔다고 생각됩니다. 성경공부 명물의 식사는 꿈과 희망이라는 영양소를 포함한 저로서는 드문 것이었습니다. 그 질과 양을 계속해 먹은 것이 로바의 집 설립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공부에서 식사를 하기 시작한 2년후에 첫번째의 사토코를 책임맡게 되었고, 그 2년후에 두명으로 늘어 갔습니다. 여기까지면 로바의 집이 필요로 하지 않았겠습니다만, "또 한명 책임지고 싶다"고하는 생각이 강해져 84년 여름 드디어 6개월간 "훼밀리 홈 실현을 위한 연수"라는 것으로 캘리포니아에 가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 귀국하자마자 성경공부에 복귀했습니다. "그것이 없기에 무리" "이것도 없기에 불가능"라는 상식적인 사고방식보다 "무엇이 있으면 훼밀리 홈이 될 수 있지?"라는 비상식적인 사고방식으로 1986년 4월부터 이 로바의 집에서 훼밀리 홈 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성경공부에서 배운 영양 풍부한 식사를 상상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어 기쁜 매일입니다.
 교회는 20년을 지나 변화해 왔습니다. 아이들로부터 손길이 멀어질 때에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아, 예배에, 성경공부에 열심히 다니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20년후, 새로운 에너지를 발로로서 로바의 집을 지역에 개방하여 아이들을 위한 여러 그룹들과 연대의 장으로서 활용하려 하고 있습니다.

✚어린이 예배
 햐쿠닌쵸교회에 오래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어린이 예배 담당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린이 예배는 어떤 것이냐고 물어보면, 담당했던 상황에 따라 여러 모양일 것이다.
 어른 예배 시간(10시반부터 1시까지)을 함께 교회에 온 아이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하는 것이 어린이 예배의 역사이다.
 1975년경 어른들은 아직 교풍회관의 작은 방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있는 장소는 복도 아니면 건물 밖이었다. 깡통차기를 하기도하고 술레잡기를 하기도 하며 지냈다.
 그 후, 어른들이 식당에서 예배를 드리게되고 그 때까지의 작은 방을 아이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아이들담당이라는 형태로 어른 한명과 그 날 모인 아이들이 자유롭게 지내는 방식이 계속되었다.
 1980년, 이케다하루요시池田春善씨가 제안하여 마치다町田, 사이토우斉藤, 시바하라柴原, 아소미치코阿蘇道子씨등이 모여 어른예배와 같은 형태의 예배를 아이들도 시작했다. 그 해는 누가복음을 텍스트로 삼았다. 함께 도시락을 먹은 후에는 종이연극, 공작, 댄스등을 하였다.
 1981년에는 중등부도 생겼다. 교장 타나카와사부로 田中和三郎, 새로운교사 타카세高瀬부부, 이마사토今里씨로 담당자가 늘었다.
 1983년에는 미즈노마코토水野誠교수에게 부탁해서 7번이나 연수회를 가졌다. 그 때는 예배의 말씀도 부탁을 했다. 네팔의 노래에 동작을 넣어서 함께 부르기도하고, 종이접기로 배를 만들기도 했던 추억이 있다.
 1984년부터는 다시금 여러 교인들에게 담당을 부탁했다. 일년간 17명이 차례로 책임을 갖고, 그 담당자가 제일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로 한 해와 구약성경을 차례로 읽기도 하는 등 해마다 대강의 계획을 세웠다. 재적자32명, 매회 7-8명의 아이들이 출석.
 그렇지만 요 1,2년, 출석자도 줄고, 담당자가 준비해 기다리고 있어도 아이들이 한명도 오지 않은 적이 여러번 있었다.
 올 해는 어린이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다. 캠프등 특별 프로그램을 가끔 갖기로 방법을 바꾸었다. 부모와 함께 오는 어린아이, 초중학생은 어른예배에 출석하고 있다.
 햐쿠닌쵸의 아이들은 전원이 교인의 자녀이다. 거의 모든 경우 부모가 출석 할 때만 멀리서 온다. 부모가 오랜시간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도 감당해 왔다.
 수양회, 크리스마스, 부활절에는 아이들도 참가하기 때문에 모든 아이들의 성장도 함께 보아 왔다. 어릴 때 모두에게 귀여움을 받았던 아이가, 조금 크면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을 돌본다.
 그리고 지금, 사회인, 대학생이 된 과거의 아이들은 집에서 주보와 로바를 읽으면서, 또 자기 부모를 보면서, 햐쿠닌쵸의 살아가는 방식을 몸의 어딘가로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배에 얼굴을 보이는 일은 드물다.
 금년 2010년 6월, 과거의 아이였던 한 명이 예배에서 증사証詞를 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큰 감사였고 감동이었다.

✚한 통의 속달
 한 통의 속달을 가끔 생각한다. 같은 때에, 오쿠보집회의 멤버 전원에게 보내진 것이므로 어딘가에 보존하고 있는 사람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소 목사를 그만두게 해서는 안된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나도 멤버인 것은 그만 둘 것이다"라는 취지의 기다켄이치 선생으로 부터의 편지였다. 그 이전에도 교회의 총회에서, 여름 수양회가 끝난 뒤, 몇번인가 아소토시후미씨가 "사임하고싶다"고 말 한적이 있다.
 30년도 넘는 이전의 것으로 날짜는 기억 안나지만, "구미노카이組の会" 연말 모임 후, 신포우쥬쿠信朋塾에서 돌아올 때 3-4분이 우리집에 와 밤 늦도록 목사(실제로는 아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대로 함께 잠을 잔적이 있었다.
 또, "잠시 일본을 떠나 한국에 가면 어떠냐" 는 제안을 한 적도 있다. 군사정권하였기에 가면 어떻게 될지 나 나름대로 책이나 잡지를 읽기도 했다.
 어찌됐든, 목사가 교인의 일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고, 교인이 목사의 일을 염려하는 것이 늘 있는 일이었다. 원인은 산리츠카三里塚문제, 도로문제, 그 외의 사회문제로 열심인 아소목사와 모처럼 목사를 모셨으므로 교회안의 일을 좀 더 해 주기를 바라는, 교회에 오는 것으로 마음의 평안을 원하는 사람들로부터의 불만이 있었다고 본다.
 나는 "목사도 인간이다"라는 말을 마음속에 반복하며 보냈다.
 사사부치쇼헤이笹渕昭平씨가 "어떤일이 있어도 우리에게는 신뢰관계가 있다"라고 말 한것이 기억난다. (아소미치코阿蘇道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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