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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이전부터의 교인 좌담회
 40주년을 맞이하면서 비교적 새로이 햐쿠닌쵸에 들어오신 분들 중심으로 좌담회를 갖게 된 것을 계기로, 전부터 계신 분들도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지? 라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멤버가 조금씩 바뀌기는 하지만 40년 가까이 햐쿠닌쵸에 속해 인상에 남는 것이나 앞으로의 것들에 관해 이야기 나누어 보았습니다.

창립 초기
사회
 저는 처음부터 오쿠보집회에 속해 있었습니다만 가정과 일의 양립으로 결혼해서 수 년간은 예배에 거의 못 참가했습니다. 하지만, 햐쿠니닌쵸의 사람들을 매우 좋아하고 존경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젊었을 때에 직장에서 "기미가요君が代・히노마루日の丸" 문제에 분명하게 반대를 한 것은 햐쿠닌쵸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40년간 인상에 남은 것이나 좋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있는 그대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미타케美竹를 나올 때는 "출애급"의 광야에 간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햐쿠닌쵸는 담이나 벽, 제약이 없는 교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데리고 오쿠보집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사람들의 출입이 많아 매우 불안해 아이도 이전 교회에 가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가정집회가 시작되고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스스로의 생각도 정리 되는 듯 했고, 어린이 예배도 시작되어 겨우 안정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건 아소목사님이 오셨기 때문이지요. 가정집회도 어린이 예배도 아소목사님이 시작하신 것입니다.
 신학생으로서 이케다하루요시池田春善씨, 그리고 몇 분인가 어린이 예배에 관계하셨습니다. "로바" 99호에 A씨가 쓴 글이 있습니다. (본문 여러모습에 수록). 그 많이 있었던 아이들도 중학생이 되면 오지 않았습니다. 신학생이었던 다나카와사부로田中和三郎씨가 중학생 예배를 담당 해, 유일하게 우리집 장남 만이 매주 와서 일대일로 상대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발길이 뚝 끊어졌습니다. 지금은 교회에 안 나갑니다.
 71년 쯔지진제津地鎮祭 나고야 고등법원 위헌판결, 77년 최고재판소 역전패소, 그 동안의 성명서나 요청서를 쓰기도하고 모두 함께 전국 자치단체에 발송하기도하고, 생각 해 보면 정말로 바빴다. 모두 젊었기에 그럴 만한 힘이 있었지요. 교회가 직접 문제에 관련 했었다는 초기의 기억 입니다.
 어릴 때 부모와 함께 다녔던 교회와 햐쿠닌쵸는 전혀 다릅니다. 응답시간의 논쟁을 들으면 "어른들이 이처럼 진지할 수 있을까" 하며 놀랬습니다. 햐쿠닌쵸는 자유롭게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이 신선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돌아가신 O씨 하고는 자극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자주 술도 함께 마셨습니다.
 세례를 받게된 동기지요.
司会 크리스챤 홈에서 자랐으면서 세례 받는 것이 늦었군요.
 늘 반발 하였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자유라고 말하며 형식적인 세례를 통해 사람이 어디가 변한다고 라면서.
 부모님 다니는 교회에는 가지 않으셨다는 것이 군요.
司会 훌륭한 자제분들 두명이나 세례를 받고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햐쿠닌쵸 안에서는 드문 일입니다.(일동 웃음)
 일과 신앙의 갭도 교회에서 진지하게 논의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힘을 얻어 견딘다고 할 까, 주위 사람들은 더욱 진지하게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쿠보집회로서 예배장소를 얻은 것이 상당히 안심이 되어 기뻤었습니다. 처음에 2,3년은 저 자신 교회를 한번 쉬면 교회가 없어진다는 위기감이 있어서, 태풍이나 대설 때도 쉬지않았고, 감기 기운이 있어도 가면은 교회에서 날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굉장한 신앙이군요.(일동 웃음)
 아소목사님이 오시면서 안심이되어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일동 폭소) 요 40년간 어머니의 사망과 정년 퇴직, 여러 일이 있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간단히 받아들여졌던 것은 햐쿠닌쵸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라도 생각합니다.
 여기서 미타케 교회로부터 나온 원인을 검증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아사노浅野목사님의 후임이 되신 목사님의 설교 비판, 두번째는 동경신학대학에 기동대 도입 비판, 이 두 요소는 사회와 시대에 책임을 진다고 하는 것으로 같은 맥락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출발 했습니다만 지금은 어떤지라는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지요.
 오쿠보를 세우기 위해 힘들었던 5년간은 아이 키우는 일로 전혀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아소목사님이 요셔서 가루이자와軽井沢 수양회에 3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참석 했던 것이 재미있었다는 인상이 남아 있습니다.
 도중에 햐쿠닌쵸를 나간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요.
 햐쿠닌쵸는 개인 개인이 해 온 것을 잘 이어 오고 있다, 그래서 저는 40년간 해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하고 있습니다.
 아소목사님은 죠시가쿠인女子学院 일과 양립해 바빴던 시기, 매년 임시총회에서 목사를 그만 두겠다고 말 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박성자 목사님이 오셔서 자매관계가 시작되자 말씀 안하시게 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있습니다만 죠시가쿠인을 그만두어 여유가 생겼기 때문 일 것입니다.
 교단 가입도 그렇게 간단히 정해졌다고 볼 수는 없겠지요.
 교단에 가입하려고 했을 때, 가까운 곳에 교단의 O교회가 있었던 것 과 전원이 찬성하지 않았기에 길어졌던 것이지요.
 잠실교회와의 교류를 통해서 저 자신이 거듭났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일합동수양회 때에 Y씨로부터 과거의 침략과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반드시 헌법을 지키고, 운동의 고리를 넓혀 가기를 부탁받아 퇴직 후 의식적으로 평화를 위한 학습과 활동을 하고있습니다.
 함께 어떤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 교회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것을 생각 속에 공유한다든가. 아소목사님이 저항을 받으면서도 초지일관해 온 행동이 컸다고 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야스쿠니靖国신사 국영화 반대 월례 데모가 있습니다만, 사회 문제를 계속 해 온 것과 필리핀이나 한국, 아시아로서의 일본을 생각해 올 수 있었던 것은 햐쿠닌쵸에서의 자극이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0대 후반에 기독교와 만나고 요40년간 햐쿠닌쵸가 자신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인지 늘 머리 속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조직은 늘 변해 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을 교회와의 관련과 교회의 가진 가치관으로 판단하며 삶의 방식에 비추어 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40년간 교회형성에 관련해 왔다는 것은 건강과 친구관계에서도 축복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속에 무거운 것도 있습니다만, 그 부분은 아직.
 잠실 교회와의 자매 관계를 통해 아시아와의 문제를 생각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방향
 앞으로의 방향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좌담회에서 이야기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지금의 햐쿠닌쵸를 생각했을 때 제일처음 창립기, 아소목사님의 시대, 그리고 가목사님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목사님 시대를 조금 더 생각해 보려합니다. 잠실교회와의 관계로 한국분들과의 친근감이 높아져 왔습니다만, 새롭게 가목사님과의 관계로 여러타입의 한국분들이 교회에 오시게되고, 한국과의 다른 루트가 열려지게 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오늘 이야기가 이었던 것처럼 가목사님이 대학에서 수업을 하게되고 햐쿠닌쵸교회의 증사의 내용이 학생들에게 받아들여져, 학생들의 반응을 목사님이 교회에 가져오셔서 전하시는 것을 통해, 햐쿠닌쵸에서의 신앙의 계승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더라도 다른 장소에서 새로운세대에 신앙의 계승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래에의 발판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왜 오쿠보집회가 교풍회관을 빌릴 수 있었는가를 말하면, 당시 내가 회관의 개수공사에 관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4대째 크리스챤으로 아버지가 목사였지만, 젊었을 때에 기독교가 아주 싫어 했었습니다. 40년전에 겨우 건축가로서 일을 할 수 있게되자 계속해서 부모의 개호가 시작되어 교회는 결석이 많아졌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즈시逗子교회와 S목사님이 계신 사쿠라모토桜本교회의 설계 일을 맡게되어 기독교를 싫어하면서도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교회건축에 관계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이전에 그리스도교신문의 취재에서 "I는몇십개나 되는 교회를 지으면서 자신의 교회는 언제 지을 것인지?" 라고 질문 받았을 때, "그런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자 "어이없는 건축가다."라고 써 있었습니다. (일동웃음)
 교회건축을 해오면서 늘 생각했던 것은, 교회는 예배가 중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배는 일종의 의식입니다. 햐쿠닌쵸도 단지 모여서 응답시간이 있는 것만가지고는 운동단체에 머물고 맙니다. 예배시간과 공간은 하나님에 의해 거룩해지는, 그같은 장소라는 생각입니다. 그러기에 햐쿠닌쵸에 와 있는 동안은 대단히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규모이면 목사님께서 나 혼자에게 말씀해주시는 듯해서 말씀에 시종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 것이 햐쿠닌쵸의 대단히 좋은 점이고, 그러기때문에 이같은 방법을 더욱 늘려 가는 것이 전도의 방책이아닌가 하고 여겨집니다. 기독교의 전도는 주일학교나 유치원이 잘 되었을 때에는 지역주민들과의 접촉이 있었지만, 그 활동이 적어진 지금은 교회가 세상에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갖고 있진 않은 편이 거꾸로 많이 받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교회에 나오게된 이유는 사회활동과 연결된다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교회에서 K씨, I씨, M씨와 만남이 츠지진제津地鎮祭문제에 관련하게 되었습니다. 타와라俵씨와의 만남과 성경공부에서 S씨와의 만남으로 월례데모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활동이 교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저에게는 교회와 직장이라는 두개의 중심이 있고, 교회는 직장일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아소목사님이나 가목사님의 지도자水先案内人로서의 매력에 따라 오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자신은 직접 활동하지 않아도 아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보久保씨, 호즈미穂積씨와 한국분들이 가까이 계셔 여러모로 시야가 넓혀져 득을 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중요하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E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단지 돌아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40주년도 시야에 넣어가면서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 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가지는 조직은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햐쿠닌쵸도 출입이 많은 유기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여러 사회적인 활동이 있습니다만, 아소목사님 농장에서의 청년들 교육이나 필리핀 지원도 좋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교분리의 모임에 G씨가 사무국으로서 30년이상 꾸준히 관계 해 온 것도 햐쿠닌쵸의 체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는 젊은이들이 오지 않는 것에대해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일본 전체의 문제인지, 교회의 문제인지, 햐쿠닌쵸교회의 문제인지, 개개인의 문제인지 잘 판단해서 앞으로 어떻게 추진해 가야 좋을 지를 검증해 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40년간 이만큼의 일들을 해 왔습니다만,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0년정도 전에 아오야마青山단기대학에 있을 때, 가케이掛井교수님과 아소목사님의 성경공부에 주에 한번 출석했습니다. 그 때, 한국은 박정희 정권의 말기로 한국신학대학에 간 선배가 정치범으로 체포되기도 해 매우 두려웠었습니다. 그런 두려운 마음을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가케이교수님의 성경공부에서는 안심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여년 후 햐쿠닌쵸에 오게 되었습니다만, 햐쿠닌쵸는 누군가가 제기한 문제를 모두가 함께 자신의 문제로서 듣고, 더우기 진지하게 생각해 주는 귀중한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흔들림없는 신앙이 있고, 이 분들에게는 무엇이든 안심하고 말 할 수 있다는 신뢰감이 있습니다.
 오사카에서 상경해 변하고 싶은 마음으로 올겐을 빌려 연습하고 있었던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M선생님과의 관계로 햐쿠닌쵸에 왔습니다만, 아소목사님을 비롯해 모두가 개성이 강하고 매우 매력적이어서 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장소이기도하고 앞으로도 줄곧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키다木田선생님으로부터 늘 "주체성의 환기"에대해 들어, 제자신도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여러모로 사회 안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지하게 활동하고 있는 분들을 보면서 이것이 신앙이라고 배웠습니다. 이 재산을 어떻게하면 젊은이들에게 전해 갈 수 있을 까 하는 것이 과제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꼭 와 보고 싶다는 가목사님의 학생들에게도 햐쿠닌쵸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크리스챤홈으로 가족이 다니던 교회를 떠나 혼자서 햐쿠닌쵸에 오게 된 것은 큰 결심이었습니다. 여러모로 활약하고 계신 분들 가운데서 필리핀문제에 깊이 관련하고 있던 코사카小坂씨의 모습이 인상에 남아있습니다. 교회로서 모두가 해야 한다는 것이아니라, 활동이 가능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햐쿠닌쵸의 좋은 점이라 봅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목사님의 정권교체라고 해야 할지 목사님 교대가 중요한 포인트를 점하고 있다고 봅니다. 가목사님의 시대가 되었어도 아소목사님이 좋은 의미에서 뒷받침하고 계시다는 이상적인 교대였다고 생각합니다. 임원회의 이름이가 세화인회世話人会(도우미 모임) 라는 것도 권위적이지 않고 훌륭한 이름이라 생각합니다. 최근엔 새로운 일을 동료들과 시작 해 예배에 출석이 어렵게 되어 교회에 속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몸이 안좋아 못 나오게 되었을 때는 교회와의 관계를 어떻게하면 좋을까하고 말입니다. 제안 입니다만 인터넷으로 예배를 집에서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교회의 매력은 출석한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듣고 공감을 갖기도하고, 그런 말을 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5년전에 일을 그만두고 한달에 한번 가정집회에서 성서를 배우고, 책을 읽는 것을 통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올해는 교회의 회계를 맡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교회 분들이 섬기고 계시구나라는 느낌과 동시에, 실제로 그분들의 헌금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도 느껴집니다. 가목사님은 "저는 누가 얼마를 헌금했는지에 대해 절대로 보지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점점 상황이 나빠진다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교회를 성장시킨다랄지 젊은이들을 데리고 온다든지를 생각하지않고, 물로 와 주면 좋지만, 지금이 좋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소목사님의 행동력이 대단히 컸다고 생각합니다. S씨와 G씨가 지금도 야스쿠니靖国데모를, 커다란 사건이나 재판이 있을 때가 아닌 지금도 꾸준히 계속하고 계시다는 것이, 저도 계속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하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아소목사님이 담임을 그만두시고 코스모농원을 시작했을 때에는 비판적이었습니다만, 코스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아소목사님이 해 오신 일이 우리들에게 돌아오게되고 그것으로 얻은 것은 큰 것이라 생각 합니다. 가목사님으로 바뀌고나서 우리들은 교육을 받고, 증사의 순서가 돌아오기도하고, 가정집회에서도 성경은 목사님 담당이었던 것이 우리들이 하지않으면 안되게 됐다든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일동웃음) 그래서 성경을 읽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에는 햐쿠닌쵸고회와 잠실중앙교회와의 자매관계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것은 들은 이야기 입니다만 맺어진 이유가 어딘가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합동수양회에 참가해도 자극보다는 무엇인지 아쉬움이랄까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자매교회관계라면 매사를 다룰 때 호흡과 걸음걸이가 기분좋게 딱 맞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실교회로부터 연락이 없고 활동이 중지되면서 햐쿠닌쵸가 혼자 된 것처럼 상당히 쓸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역시 자매관계는 소중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자매관계는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반성과 함께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양부모里親로서 지금까지 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들의 도움과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히가시무라야마東村山의 도영都営단지에서 세명의 아이들을 받아들여 훼밀리홈을 해 보고 싶다고 생각 했을 때, 일정한 주거면적이 필요해서 성경연구회를 중심으로 여러분들이 진지하게 염려해 주시고, 집을 지금의 하치오우지八王子에서 찾아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셨기에 훼밀리홈을 개소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햐쿠닌쵸는 한사람이 행동하면 모두가 지원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때 그때로 어려운 시기도 있었습니다만,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목사님이 "로바"에 쓰셨습니다만 지금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 하는 말씀으로 극복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햐쿠닌쵸에서 처음 배운 것은 아무리 목사님이라도 평신도의 한사람이라는 것이 으뜸. 그 위에 목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과 완전히 같은 입장의 신앙인으로서 교회를 섬겨 가는, 앞으로도 그와같이 살아가고 싶다고, 그 안에서 프로로서 맡겨진 목사로서의 일을 해 가겠다고, 그 두가지 입니다.
 햐쿠닌쵸교회에서 제일많이 배운 것은 교회형성이라는 것, 그것은 신앙의 바람직한 모습으로부터 예배의 모든 내용까지 포함해서, 그것을 목사 한사람이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것, 성경도 목사 한사람이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응답을 통해 목사로서 전문적인 것을 생각하는 면도 있고, 서로 배운다는 것이 제일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목사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못듣는 것 이것이 가장 불행한 점입니다.
 제 자신의 것으로는 조금전에 눈물이 나왔습니다만, 아소목사님과 미치코씨가(미치코씨는 굉장합니다.) 끊임없이 도와 주셨습니다. 물론 여러분도 보이지 않게 도와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지구내의 교회에서는 제가 행복해 하는 것을 질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굉장히 비판적인 부분도 많습니다만, 비판은 반성을 포함하는 비판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햐쿠닌쵸는 다른 교회와 비교해 비교적 젊은이가 많은 것은 이 교회에 매력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비판을 말해 본다
 가끔 생각나는 것은 과거를 그리워해 과거만있고 앞이 안보인다는 의구심을 갖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느끼는 것은 햐쿠닌쵸는 미타케교회로부터 나와 만들어진 교회이기에 늘 여러분들의 생각이 그곳에 돌아갑니다. 정신적인 지주가 있다는 것은 귀중합니다만, 그곳에 속한 적이 없는 사람이나 젊은 사람들이 회고담을 반복해서 듣게 되는것에 대해 어떨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역사를 안단는 것은 공부도 됩니다만, 저는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회 그와 같은 의견은 다른 곳에서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W씨도 시각장애자의 일을 햐쿠닌쵸에서 하고싶어서 몇번이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반응이 없었기에 발길이 뜸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시각이 제일로 인식을 합니다. 그러기에 건물이 있고 목사님이 훌륭한체 하면서 말하면 마음에 남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 순수한 집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건물이 있는 교회가 좋다든지 없어도 좋다는 것은 각자의 생각에따라 다른 것으로 지금 햐쿠닌쵸는 건물이 없기에 이와 같은 스타일로 오는 사람 거절하지않고, 제가 생각하기에 가는 사람도 말리지 않는 것이 도가 지나칠 정도라고 말할까 예를들면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교회로서 돌본다든지 하는 자세는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에는 교인들에게 별로 돌보지 않는 교회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랜동안 나오지 못하는 기간이 있었습니다만, 아소목사님은 늘 "로바"와 주보에 한 마디 코멘트를 적어 주시는등 신경을 써주셨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오게 된다면 동기와 어떤 것일까요. 제 자신은 병으로부터 나음을 얻기 위해 나오게 되었습니다. 교회에는 여러 타입이 있어서, 밋션스쿨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 사회 문제로 나오게 된 사람도 있고, 나오게 된 당시에 기독교가 한창이었기에 오게 됐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시대라면 어떤 생각으로 젊은이들이 오는지, 오지않는지 말입니다.
 앞에서 가목사님의 말씀으로 R대학의 학생으로 교회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햇는데, 그런 사람들은 어떤 교회에 가고 싶어하는지요?
사회 기독교를 배우고 싶다고 적고 있는 사람도 많았고.
 이곳이 좁아서 들어 오지 못하게 되면 어떻하지요.
 아소목사님의 학생들도 왔었지요.
사회 H씨가 말씀하신것처럼 인터넷 예배는 어떨지요.
 마음만 먹으면 바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패스워드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한정시킬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개방할 것이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영상도 넣을 것이면 누군가 카메라를 돌리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영상을 넣지말고 음성만으로도 할 수 있는지요?
 그것은 CD하고 어떻게 다른지요?
 동시에 참가 할 수 있습니다.
 그 문제는 바로 눈앞이라고 할 까 현실적입니다.
사회 앞으로 점점 모두 나오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곳에는 아무도 없고 모두들 집에서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일동웃음)
 그렇게 되면 곤난하지요.
좌담회 일시 2010년6월20일, 7월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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