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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지막으로
 햐쿠닌쵸교회 창립 4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아소목사님으로부터 가목사님이 이어받아 10여년이 지났다. 마지막으로 이 두 분의 문장을 인용하여 햐쿠닌쵸의 풍경을 마감하고자 한다.
 아소목사님은 창립 40주년의 지금, 폐의 질환으로 산소호흡기로 생활하고 있다.
 거의 병상위에서 체력이 약해지며 불치의 병과 싸우고 있다. 본인에게 새롭게 쓰도록 했으나 무리. 그래서 목사님이 10년전에 쓰신 편지, 모두의 감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을 마감으로서 소개하고자한다.

사랑하는 햐쿠닌쵸교회 2세들에게의 편지
 
―창립 30주년 기념예배에의 초대
 여러분 변함없이, 아니 많이 변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건강하신지요.
 여기에 "햐쿠닌쵸2세"라고 여러분을 제 나름대로 정한 곳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렇게 부르는 것이 여러분을 가장 가깝게 느끼고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 이렇게 적습니다.
 실은, 햐쿠닌쵸교회는 금년 11월로 만 30년이 됩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이 30년전 일본그리스도 교단 미타케美竹교회를 나와서 작은 기도예배를 오쿠보大久保에 있는 교풍회관矯風会館에서 시작해,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오쿠보집회로 부터 햐쿠닌쵸교회에, 목사도 아소로부터 가정순씨로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는 예전과 같이 자유롭고 활기가 넘치는 교회인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독특한, 그리고 가장 교회의 본질을 실천하고 있는 교회로서의 자부심은 지금도 예전과 같습니다. 단지 부모님 세대는 30년 나이를 든 것이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조그만했던 아이, 초등학생이었던 여러분도 지금은 어른이 되었습니다. 함께 교회의 예배와 어린이 예배, 수양회, 캠프화이어, 불꽃놀이, 게임과 춤, 그리고 파티도 했습니다. 기억납니까. 아이들은 아이들의 프로그렘을 가졌고, 중고등학생, 대학생별 프로그램과 어른의, 세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한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자매교회와의 합동캠프로 방한해 대 환영을 받았던 감격을 잊지는 않았겠지요. 뜻 깊은 경험을 많이 해서 여러분들은 크게 성장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더우기 햐쿠닌쵸교회의 멤버인 부모님에 의해 자라고 교육을 받은 여러분에게는 지식만이아니고 신앙의 유산이 이어지고 있다고 여기며, 그 일부 혹은 그 전부를 이어받고 있다고도 믿고 있습니다. 물론 신앙은 개인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헌법이 보장하며, 우리들도 소중하게 여기며 지키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이제 30주년을 10월 29일에 오쿠보의 자리에서 특별한 날로서 맞이하고저 합니다. 그것은 교풍회관의 사용이 금년도로 끝날지도 몰라 새로운 예배 장소를 찾고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번 30년째에 반드시 "2세" 여러분들도 모두 모여 주셔서, 함께 예배드리고 싶다는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노인이 된 부모들의 꿈입니다만, 실현이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강요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시간을 내어 출석해 주셨으면 하여 안내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당일에는 미타케교회로부터 나온 멤버들 중 가케이고로掛井五郎씨에게 말씀을 부탁드렸습니다. 반드시 여러분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씀을 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1세들도 가능한한 출석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햐쿠닌쵸 2세들로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부모의 부족함, 불신앙으로도 생각하며,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2세는 2세로서 훌륭히 살아가리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부모와 같은 교회에 출석하려하는 무른 자식으로 그 누구도 키우지 않았다고 허세라도 부리고 싶습니다. 그러기에 이번 30주년에는 여러분이 출석해 주실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재회가 가능한 소망이며 관계였다고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건강하기를, 좋은 일 하며, 좋은 인생을 전 생애에 있어 보내기를 바랍니다.
(2000년 10월 10일, 햐쿠닌쵸교회 임원회, 글책임 아소토시후미阿蘇敏文)

계속해서 가목사님의 증사 중, 현재의 의미와 미래를 말씀하시는 문장을 소개합니다.

현재・주어진 기회
   
누가복음 13:1-9
1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금년들어서 事柄의 시간과 사건성事件性에 대해 관련을 갖는 말씀을 드려왔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연이라 생각합니다만, 이번에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몇번이고 생각하고 있으면 하나의 형태가 만들어지지 않겠는가고 생각합니다. 이번으로 마지막이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에는 "현재"라는 제한된 시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서는 이 현재라는 시간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입니다.
 현재라고 하는 시간이 우리들에게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고 생각 했을 때, 지난번과 같이 두가지 면으로 생각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현재를 과정/프로세스로서, 다른 하나는 현재를 일/사건으로서 생각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선 현재를 과정으로서 생각했을 때, 다가 올 수 밖에 없는 미래는 어떠한 것일 까요. 내세라고 말 했을 때는 이미 만들어진 미래입니다만, 만약에 그것을 믿고 있다고 한다면 현재라는 것은 어제로부터 오늘을 거쳐 내일에로, 과거로부터 미래에로 가는 통과 지점에 불과합니다. 이 경우 현재라는 것은 참을 때, 지나갈 수 만 있으면 되는 때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현재를 사건으로서 이해한다면, 현재라는 시간성과 공간성이 보다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동시에 미래와의 관계도 보다 구체적으로 됩니다. 시간 외에도 장소, 환경, 원인 등의 의미를 갖는 것이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미래라는 것은 현재에 있어 바꿀 수 있는 구체적인 미래가 되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
 성서가 가르치는 현재라는 것은 이와 같은 사건성 안에서 이해 해야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를들면 복음서 자체는 서기30년경의 팔레스티나에서 살고 있었던 예수라하는 남성의 짧았던 삶과 죽음의 사건을 근거로 기록된 사건화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오늘은 이러한 생각을 전제로 하면서 현재라는 개념이 갖는 성서적 이해에 대해 조금 상세히 검토해 볼 까 합니다.
 성서의 본문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성서는 1절에서 5절까지와 6절에서 9절까지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만, 후반부는 전반부의 내용을 설명하는 비유말씀으로 되어있습니다.
 우선 전반부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반부는 두가지의 참사, 비참한 사건으로 이야기가 시작 됩니다. 하나는 아마도 예루살렘신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당시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의 피를 제물에 섞었다고 하는 사건 입니다. 다른 하나의 사건은 4절이하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예루살렘 성곽에 있는 실로암 탑이 무너져, 18명이 죽었다고 하는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에 관한 당시 사람들의 이해를 예수의 대답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사건으로서 받아 들였다기 보다 재난으로서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건을 일으킨 자들의 책임의 시비와 사고의 구체적인 원인규명 보다도 종교적인 인과관계와 이해로서, 즉 자기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죄가 자기보다 많다고 하는 대단히 자기 중심적인 판단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모두가 하나님을 잊은 결과이기에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와같은 대답은 매우 추상적이고 애매한 대답처럼 보입니다만, 지난번 성경공부에서 읽었던 요한복음 9장의 부분과 유사성이 강한 말씀입니다. 태어 날 때 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누가 죄를 지었기 때문인가, 본인인가 부모인가 라는 말씀중에 예수는, 누구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예수의 대답으로부터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사건의 희생자를 결코 객체화, 즉 대상화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희생자를 본인의 죄로인해 처벌받은 존재로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사건의 배후에 자신들 모두의 책임이 있다고 하는, 그러기에 자신들이 회개하고, 자신들의 그 때까지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한가지 구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회개에 대해서는 같은 시대를 살아 온 세례요한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이 두사람의 회개의 내용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는 지요?
 요한은 광야에서 복장도 음식도 변변치 못한 것으로 대단히 금욕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가까운 시기에 도래할 것이라는 종말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즉 요한은 현재보다 미래가 중심입니다.
 예수의 생각은 요한과는 매우 틀렸습니다. 우선 누가복음 7장 18절 이하를 보면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 "오실 분은 당신이신지요. 아니면 다른 분들 기다려야만 하는지요" 하고 질문합니다. 예수는 "돌아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전하세요. 눈이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게되고, 다리가 부자유스럽던 사람이 걷고, 낳기 어려운 피부병을 앓고 있었던 사람이 깨끗하게되고, 귀가 들리지 않던 사람이 듣게되고, 죽은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다." 고 대답합니다. 이것만 보고도 알 수 있는 것 처럼 눈이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게되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게 된다는 이야기는, 요한처럼 단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해서라도 넘겨 어려움을 피하겠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하는 생각이 아닙니다.
 처음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현재라는 것을 과정으로서의 현재와 사건으로서의 현재를 나누어 보았을 때, 요한은 과정적인 현재로, 예수는 그 기적 하나하나가 이미 사건성을 갖고 있고, 동시에 미래와의 관련해서 분명히 보여지는 것이 있습니다. 즉, 요한의 세례라는 종교적 정결 행위보다 예수의 병든사람을 고치고, 장애를 갖고있는 사람이 회복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등의 행동이 보다 구체적인 미래를 맞이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다시말씀드리자면 예수에게 있어서 회개가 필요한 현재라는 것은 미래를 위한 현재의 개선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현재라는 것은 미래를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미래을 결정하는 열쇠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이야기와 관련해서 후반부의 예수의 비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저 합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이 말씀은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에 대해 포도원 주인과 과원지기와의 사이에 나누어진 대화 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을 때가 되고나서 3년이나 기다렸지만 열매가 열리자 않자 포도원 주인의 합리적인 계산으로 그 시점에서 잘라 넘어트리는 편이 손해를 더 입지는 않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그에 대해 과원지기는 기다려 온 3년을 포함해서 지금까지 길러 온 세월을 생각하면 조금 더 기다려 보는 편이 낳지 않겠는 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과원지기는 1년만 더 시간을 주면 비료의 양을 더 늘려 정성을 다해 키워 열매를 맺게하고 싶다고 간청을 합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 그 후에 농장주가 뭐라고 대답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적혀있지 않습니다.
 이 비유로부터 몇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원지기가 포도원 주인의 지시에 무조건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 맺지 못한 것은 무화과나무의 탓이 아니고,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예루살렘에서의 희생자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재난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처럼 매사를 대상화 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포도원주인의 잘라 넘어트리라는 지시를 거부하고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행동에는 자유와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과원지기의 주체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상대(여기서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굳은 신뢰가 가능하게 했다고 봅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도 하나님께 때때로 기다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와 같이 기다림을 요청하는 것, 이 행동자체가 사건이고, 이 사건을 통해야만 미래에 열려진 가능성으로서의 현재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단지 과정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깔려져 있는 레일, 교리 속에 살아가는 것이 편한하겠지요. 거기에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대상화하는 것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사건에는 말려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신뢰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구원은 자신의 책임으로 부터 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예수님도 필요없습니다.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와의 깊은 관계성 속에 있습니다. 현재는 미래를 위한 단지 통과지점이 아닙니다. 현재를 개선하는 사건 속에서 열려진 미래입니다. 따라서 현재라는 것은 주어진 기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현재는 사건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2010년2월14일・로바1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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